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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문학

온다 리쿠 『리세 시리즈』 복간, 한 권의 환상의 책에서 다섯 갈래의 미로가 되기까지

by 자정의 일본서재 2026. 10. 19.

한 권의 책에서 펼쳐지는 기숙학교와 정원, 다섯 갈래의 미로를 형상화한 온다 리쿠 리세 시리즈 복간 오리지널 일러스트

 

좋아하는 작가가 생기면 자연스레 예전 발표작을 거슬러 찾아 읽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절판'이라는 두 글자 앞에서 멈춰 서는 순간이 꼭 한 번은 옵니다. 중고 서점을 뒤지거나 도서관 서가를 찾아다니다 결국 포기한 경험, 일본 소설을 꾸준히 읽어 온 독자라면 한 번쯤 있으실 겁니다.

 

온다 리쿠(恩田陸)의 리세 시리즈(理瀬シリーズ)가 바로 그런 경우였습니다. 2000년대에 국내에 소개됐다가 하나둘 자취를 감추면서 제목은 알아도 구해 보기는 어려운 작품들이 됐습니다. 그렇게 멈춰 있던 시간이 흘러 지난 2025년 가을 새로운 옷을 입고 한꺼번에 돌아왔습니다. 오늘은 이 연작이 어떤 매력을 품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독자 곁으로 다시 올 수 있었는지 짚어 보려 합니다.

 

목표의 스무 배가 모였다

이번 재출간은 출판사 반타가 '리세 시리즈 패키지 에디션'으로 묶어 2025년 9월에 펴냈습니다. 과거에 출간됐던 네 편을 새롭게 다듬고, 국내에 처음 선보이는 신작 한 편을 더한 다섯 종 여섯 권 구성입니다. 출판사 측은 기존 원고를 그대로 쓰지 않고 새 번역과 세밀한 검토를 거쳤다고 밝혔습니다. 특히 첫 권『삼월은 붉은 구렁을(三月は深き紅の淵を)』을 옮긴 권영주 역자는 이 번역으로 일본 고단샤(講談社)가 수여하는 제20회 노마문예번역상(野間文芸翻訳賞)을 수상한 바 있습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제 눈길을 가장 오래 붙든 대목은 출간 전 북펀드 결과였습니다. 온라인 서점 알라딘에서 열린 펀딩은 목표액 100만 원으로 출발했는데, 마감 때까지 약 2,096만 원이 모여 목표치의 스무 배를 훌쩍 넘겼습니다.

정식 출고 전에 여섯 권짜리 세트를 기꺼이 예약하겠다는 후원자가 이만큼 많았다는 건 구할 수 없던 시절에도 재간행을 손꼽아 기다린 애독자가 꾸준히 존재했다는 뜻입니다. 출판사가 대대적인 작업을 결정한 배경에도 그 간절한 수요를 눈으로 확인한 영향이 컸을 겁니다.

 

한 권의 '환상의 책'에서 시작된 세계

이 연작은 미즈노 리세(水野理瀬)라는 소녀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고딕풍 미스터리입니다. 일본 현지 발표 순서는 이렇습니다. 1997년『삼월은 붉은 구렁을(三月は深き紅の淵を)』, 2000년『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麦の海に沈む果実)』, 2001년『흑과 다의 환상(黒と茶の幻想)』, 2004년『황혼녘 백합의 뼈(黄昏の百合の骨)』가 차례로 세상에 나왔고, 17년이 흐른 2021년에 『장미 속의 뱀(薔薇のなかの蛇)』이 뒤를 이었습니다. 이번 패키지에서 한국 독자와 처음 만나는 신작이 바로 마지막 표제작입니다.

 

전체 흐름 가운데 가장 독특한 위치에 놓인 작품은 단연 첫 권인『삼월은 붉은 구렁을』입니다. 정작 중심인물인 리세가 전면에 나서는 구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체가 서로 독립된 네 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고 장마다 등장인물도 분위기도 전혀 다릅니다. 수수께끼를 쫓는 추리극부터 이국적인 여행기 같은 에피소드, 폐쇄적인 학원물과 집필을 구상하는 작가의 고백록까지 다채롭게 이어집니다. 각기 다른 네 편을 하나로 묶어 주는 연결 고리는 오직『삼월은 붉은 구렁을』이라는 제목의 '환상의 책'뿐입니다. 온다 리쿠(恩田陸)는 표제작과 똑같은 이름을 가진 가공의 서적을 둘러싼 일화들로 한 권을 온전히 채웠습니다.

 

이러한 액자식 장치는 단권 안에서 끝나지 않고 세계관 전체로 뻗어 나갑니다. 마지막 제4장「회전목마(回転木馬)」에는 미즈노 리세와 유리(憂理)라는 인물이 스치듯 등장하는데, 이들은 3년 뒤 발표된 장편『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의 주역들과 이름이 같습니다. 또한 작중 '환상의 책' 제1장 제목으로 언급되는「흑과 다의 환상」은 훗날 동명의 장편소설로 어엿하게 독립합니다. 한 작품 안에 심어 둔 작은 씨앗이 수년에 걸쳐 저마다 다른 줄기로 자라난 셈입니다. 저는 이 독특한 가지치기야말로 온다 리쿠라는 소설가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단서라고 생각합니다. 한 편을 매듭짓는 자리에서도 언제나 다음 무대로 건너가는 문을 열어 두는 창작자이기 때문입니다.

 

기숙학교에서 저택까지, 이어지는 네 작품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는 연작의 본격적인 출발점이자 중심축을 담당합니다. 습지에 둘러싸인 전원 기숙학교에는 "3월이 아닌 달에 들어온 전학생은 학원에 파멸을 부른다"는 불길한 전설이 내려오는데, 리세는 하필 2월 말에 이곳에 발을 들입니다. 그 뒤로 재학생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심야에 교령회가 열리는 등 기묘한 사건이 꼬리를 뭅니다. 작가는 자신의 장기인 폐쇄된 학원이라는 공간과 이방인 전학생이라는 구도를 여기서 가장 밀도 높게 그려 냅니다.

 

상하 두 권으로 나뉜『흑과 다의 환상』은 일종의 외전에 가깝습니다. 학창 시절 동창이었던 남녀 네 명이 함께 남쪽 섬으로 여정을 떠나는 전개로, 리세 대신『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의 유리가 모습을 비춥니다. 이어지는『황혼녘 백합의 뼈』에서는 한층 성장한 리세가 외할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마녀의 집'이라 불리는 오래된 서양식 저택에서 두 이모와 기거하며 겪는 미스터리를 다룹니다. 그리고 17년 만에 더해진『장미 속의 뱀』에서는 영국 런던으로 유학을 떠난 주인공이 장미 저택이라 불리는 낡은 건물과 연쇄 살인 사건에 휘말리게 됩니다.

 

다섯 권의 미로에 발을 들이는 두 가지 방법

다섯 작품이 느슨하면서도 정교하게 얽혀 있다 보니, 어느 쪽에서 먼저 출발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독서 경험이 만들어집니다. 발표 순서를 따라『삼월은 붉은 구렁을』부터 펼치면 정교한 액자소설이 거대한 연작으로 뻗어 나가는 진화를 목격하게 되고, 중심축인『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부터 집어 들면 미즈노 리세라는 매혹적인 인물의 서사에 단숨에 빠져들게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기숙학교의 본편을 먼저 읽은 뒤 첫 권으로 되돌아가 작가가 흩뿌려 놓은 수수께끼의 조각을 맞춰 보는 여정이 가장 즐거웠습니다.

다시 세상에 나온 책을 손에 쥔다는 것

출판물이라는 건 한번 명맥이 끊기면 독자 곁으로 돌아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 재간행 소식을 접했을 때 제 시선은 결과물보다 그 복원의 과정에 먼저 머물렀습니다. 구할 수 없던 세월 동안에도 이 세계를 잊지 않은 독자들이 사전 펀딩으로 마음을 모았고, 출판사는 정성스러운 새 번역으로 화답했습니다. 독자의 오랜 기다림이 잠들어 있던 문학을 되살려 낸 드문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에게도 서점으로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절판 도서가 있으신가요? 어떤 제목인지 댓글로 들려주시면, 언젠가 이 공간에서 반가운 소식을 함께 나눌 날이 오기를 고대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