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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문학

[자정의 일본서재] 7편. 히가시노 게이고(東野圭吾) 소설에 순수한 악인이 없는 이유

by 자정의 일본서재 2026. 8. 20.

비에 젖은 어두운 골목길 아스팔트 바닥에 차가운 칼이 놓여 있고, 그 뒤로 코트를 입은 남자가 쓸쓸하게 멀어져 가는 뒷모습. 네온사인의 붉고 푸른 불빛이 차가운 누아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2편에서『용의자 X의 헌신』을 다루며 범인이 밝혀진 뒤에도 후련함보다는 먹먹함이 남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東野圭吾)의 소설을 여러 편 읽은 독자라면 비슷한 경험을 한 번쯤 했을 겁니다. 범인이 잡히고 사건이 해결돼도 "그래, 저 사람이 나쁜 놈이었구나" 하고 후련하게 책장을 덮게 되는 경우는 드뭅니다. 오히려 범인의 사정을 알고 나면 마음이 무거워지는 쪽에 가깝죠. 이번 7편에서는 그의 소설에 유독 '순수한 악인'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를 짚어보겠습니다.

이 글에는 각 작품의 결말이나 핵심 반전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작품 소개에 등장하는 기본 설정 정도만 다룹니다.

 

핵심 한눈에 보기

항     목 내     용
문학적 계보 마쓰모토 세이초(松本清張)가 개척한 사회파 추리소설(社会派推理小説)의 흐름을 잇는 '신사회파 미스터리(新社会派ミステリー)'
핵심 질문 '누가 범인인가'보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는가'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작품 『용의자 X의 헌신』, 『방황하는 칼날(彷徨う刃)』 등
자주 다뤄지는 동기 사랑, 후회, 궁지에 몰린 상황, 제도의 공백

1. 마쓰모토 세이초의 후예  - 사회파 추리소설이란

일본 추리소설에는 '사회파 추리소설(社会派推理小説)'이라는 하나의 큰 흐름이 있습니다. 1950~60년대 마쓰모토 세이초(松本清張)가 개척한 이 장르는 트릭이나 밀실살인 같은 본격 추리의 재미보다 '이 사람은 왜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질문에 무게를 둡니다. 범죄를 한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그 사람이 놓인 사회적 상황 - 가난, 차별, 억울한 처지 - 의 결과로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마쓰모토 세이초(松本清張, 1909~1992년 )는 누구인가?
원래 순문학 작가로 출발해 1953년 제28회 아쿠타가와상(芥川賞)을 받았지만 이후 추리소설로 방향을 틀어 1958년『점과 선(点と線)』과『눈의 벽(眼の壁)』가 잇달아 베스트셀러가 되며  '사회파 추리소설' 붐을 일으켰습니다. 트릭보다 범행의 동기를, 비범한 명탐정보다 평범한 개인을 앞세우고 범죄 배경의 사회 문제를 파고드는 그의 작풍은 니시무라 쿄타로(西村京太郎)·모리무라 세이이치(森村誠一)를 거쳐, 스스로를 '세이초의 장녀'라 칭하는 미야베 미유키(宮部みゆき)에 이르기까지 일본 추리소설의 큰 줄기가 됐습니다. 일본 추리 문학사에서는 그를 '사회파 추리소설의 아버지'라 부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계보를 잇는 대표 작가로 꼽힙니다. 특히『백야행』(3편)과『용의자 X의 헌신』(2편) 이후의 작품들은 '신사회파 미스터리(新社会派ミステリー)'로 분류되곤 하는데, 여기에는 의료·금융 같은 구체적인 사회 시스템과 인간의 감정이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파고드는 그의 스타일이 담겨 있습니다.

2. '누구'보다 '왜'를 묻는 이야기

본격 추리소설이 "범인은 셋 중 누구인가"를 감추는 데 공을 들인다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여러 작품은 오히려 이야기 초반에 범인을 밝히거나 짐작하게 해두고 정작 궁금증은 '동기'로 옮겨갑니다. 앞서 2편에서 다룬『용의자 X의 헌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건을 저지른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게 되는 순간 독자는 그를 쉽게 미워하기 어려워집니다. 사랑, 후회, 지켜야 할 존재 등 범행의 이유가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3. 법이 놓치는 자리 -『방황하는 칼날』이 던지는 질문

이런 특징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작품 중 하나가 2004년 발표된『방황하는 칼날(彷徨う刃)』입니다. 하나뿐인 딸을 잃은 아버지가 딸을 해친 이들의 정체를 알게 되고 스스로 심판에 나서기로 결심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가해자가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무거운 처벌을 피해갈 수 있다는 현실, 즉 일본의 소년법(少年法)이라는 딜레마 앞에서 이 소설은 "법이 지켜주지 못하는 피해자가 스스로 칼을 들었을 때 과연 우리는 그를 범죄자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 작품은 한국에서도 2014년 정재영 주연으로 영화화됐을 만큼 국경을 넘어 공감을 얻은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4. 그렇다면, 진짜 '악'은 무엇인가?

결국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에서 지탄받아야 할 대상은 특정한 한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을 궁지로 몰아넣은 상황 그 자체인 경우가 많습니다. 가난, 따돌림, 가정 안에서 벌어지는 폭력, 그리고 제도의 공백. 그의 소설을 읽고 나면 마음이 편치 않은 이유는 어쩌면 그 상황이 남의 일 같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나오며: 사건의 진실에 다가섰을 때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것들

히가시노 게이고(東野圭吾)의 소설을 덮을 때마다 우리 마음속에 여운이 남는 이유는 이야기가 단순한 권선징악의 카타르시스로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건의 전말을 알고 난 뒤에는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 속에 방치된 채 어쩔 수 없는 선택을 내몰린 평범한 인간의 얼굴이 남습니다.

 

법과 제도는 때때로 가장 아픈 곳을 보호해주지 못하고 벼랑 끝에 몰린 개인은 차가운 현실 속에서 비극적인 선택을 하게 됩니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그려내는 인물들은 우리에게 불편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진짜 악은 누구에게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 비극으로부터 얼마나 안전한가 하고 말입니다.

 

결국 그의 미스터리가 건네는 진짜 메시지는 날카로운 트릭의 해답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시선과 인간성에 대한 묵직한 성찰일지도 모릅니다.


다음 8편에서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작품 속에서 꾸준히 그려온 일본 사회의 그늘 - 이지메·가정폭력·빈곤 - 을 구체적인 작품들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참고: 사회파 추리소설·신사회파 미스터리의 계보 및 마쓰모토 세이초 관련 사실관계는 한국어 위키백과·나무위키와 관련 학술·비평 자료를, 『방황하는 칼날』 관련 사실관계는 나무위키와 국내 도서 정보(교보문고·예스24·알라딘)를 확인해 반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