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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문학

히가시노 게이고(東野圭吾) 소설 속 악인 없는 범죄 뒤에 숨겨진 사회의 그늘

by 자정의 일본서재 2026. 8. 21.

히가시노 게이고(東野圭吾) 소설 『편지』와 사회적 소외를 상징하는 쓸쓸한 방과 도시의 그늘을 담은 일러스트 썸네일

 

지난 7편에서 히가시노 게이고(東野圭吾)의 소설에 '순수한 악인'이 잘 등장하지 않는 이유를 살펴봤습니다. 범인을 궁지로 몰아넣은 건 대개 그 사람 개인의 악함이 아니라 범인에게 놓인 사회적 상황이었습니다. 이번 8편에서는 그 상황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봅니다. 그의 소설 곳곳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세 가지 사회적 그늘, 빈곤과 가정폭력, 그리고 또래 집단 속 소외입니다.

이 글에는 각 작품의 결말이나 핵심 반전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작품의 기본 설정과 사회적 배경 위주로 다룹니다.

한눈에 보기

사회적 그늘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작품 비     고
빈곤과 범죄, 그 이후의 낙인 『편지(手紙)』(2003) 제129회 나오키상(直木賞) 후보작, 2006년 영화화, 2018년 드라마화
가정 안의 폭력 『나니와 소년탐정단(浪花少年探偵団)』(1988) 2000년 NHK, 2012년 TBS 드라마화
또래 집단 속 소외 데뷔작 『방과후(放課後)』(1985)부터『백야행(白夜行)』(3편)까지 학교라는 공간이 반복적인 배경으로 등장

1. 빈곤이 부른 범죄,  그 이후의 낙인

2003년 발표된『편지』는 부모를 여의고 단둘이 남은 형제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동생의 대학 학비를 마련할 길이 없던 형은 빈집인 줄 알았던 부잣집에 몰래 들어갔다가 예상치 못하게 집에 있던 노부인과 마주치자 우발적으 살인을 저지르고 맙니다.

 

형은 감옥에 들어가고 동생은 '살인범의 동생'이라는 꼬리표를 평생 짊어지게 됩니다. 취업도, 연애도, 결혼도, 그가 쌓아 올리려는 모든 관계 앞에 그 꼬리표가 먼저 도착해 있습니다.

 

이 소설이 묻는 건 형의 죄가 아니라 죄를 지은 사람의 가족을 대하는 사회의 시선입니다. 가난이 범죄로 이어지는 과정도 그 범죄가 남은 가족에게 대물림되는 차별도 모두 개인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사회가 만들어낸 그늘에 가깝습니다.

 

제129회 나오키상 후보에 올랐던 이 작품은 2006년 영화로, 2018년에는 드라마로도 만들어지며 오랫동안 사랑받았습니다.

2. 가정이라는 이름의 폭력

1988년 출간된 연작 단편집『나니와 소년탐정단(浪花少年探偵団)』은 오사카의 한 초등학교 교사 다케우치 시노부(竹内しのぶ)와 그의 반 아이들이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파헤치는 이야기입니다.

 

그 첫 번째 에피소드는 담임을 맡은 아이의 아버지가 살해되는 사건으로 시작하는데, 평소 가정폭력에 시달려온 아이와 그 어머니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됩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었고 의문을 품은 시노부 선생님이 직접 진상을 파헤치기 시작합니다.

 

명랑한 학원물의 분위기를 띠고 있지만 그 배경에는 가정 안에서 조용히 벌어지는 폭력이라는 무거운 소재가 깔려 있습니다.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는 가정 안에도 아이들이 감당해야 하는 폭력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히가시노 게이고는 유쾌한 탐정극의 틀 안에 담아냈습니다.

 

이 작품은 2000년 NHK에서, 2012년에는 TBS에서 각각 드라마로 만들어지며 두 차례 영상화됐습니다.

3. 또래 집단 속 소외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에서 '학교'는 유독 자주 등장하는 배경입니다.

 

데뷔작『방과후(放課後)』부터 여고를 무대로 삼았고, 앞서 3편에서 다룬『백야행(白夜行)』 역시 두 주인공이 짊어진 유년 시절의 그늘이 이후 삶 전체를 지배한다는 점에서 이 흐름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폐쇄적인 또래 집단 안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소외와 압력은 그의 여러 작품에서 사건의 표면 아래 깔린 배경음처럼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성인이 저지르는 범죄만큼 극적이지는 않지만 학교라는 공간에서 아이들이 겪는 소외는 그의 소설 속에서 어른이 된 이후에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로 그려지곤 합니다.

 

이렇게 가난, 가정 안의 폭력, 또래 집단 속 소외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곳곳에서 형태를 바꿔가며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7편에서 살펴본 '악인 없는 범죄' 서사가 가능한 것도 이런 사회적 그늘이 늘 범인보다 먼저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마무리: 히가시노 게이고의 시대의 그늘을 포착하는 온기 있는 시선

히가시노 게이고(東野圭吾)의 소설에는 차가운 단죄 대신 사람을 이해하려는 온기가 깃들어 있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이들의 마음 구석까지 외로움과 절박함을 비추며 남겨진 이들에게는 다시 살아갈 여지를 남겨줍니다. 결국 그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트릭을 풀어가는 즐거움을 지나 우리 사회가 그동안 누구를 소외시켜 왔는지 마주하는 조용한 성찰의 시간을 갖게 합니다.

 

다음 9편에서는 그의 초기작과 최근작을 나란히 놓고 데뷔 이후 4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문체와 주제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참고:『편지』 관련 사실관계는 일본 위키백과와 국내 도서·영화 정보(교보문고·예스24·다음영화)를,『나니와 소년탐정단』 관련 사실관계는 한국어 위키백과와 일본 방송 정보를 확인해 반영했습니다.